“전두환보다 원망하는건”…‘이태신’ 실존인물 생전 증언
23.12.08

98f54cb4ef50c389fe4d292beaded6f5e9912bcc2538724c7bd3c04733b8dfc972622ef2294fc9e609a5eda8be1390f80ba8a36ce3744b3de59630e274c810cb


12·12 군사 쿠데타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 500만명을 넘기며 흥행 중인 가운데 극에선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의 생애가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배우 정우성이 극중 연기한 이태신 역의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육성이 공개돼 뭇사람들의 울분을 일으켰다.

장 전 사령관이 1995년 출연한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 방송 영상을 MBC가 6일 유튜브에 공개했다. 영상은 크게 주목받으며 단 하루 만에 170만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당시 방송에서 장 전 사령관은 “우리 국민들이 12·12와 같은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쿠데타의 진상을 알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이태신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광(황정민) 보안사령관에게 끝까지 대항하는 것처럼 실제로 장 전 사령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일으킨 군사 반란을 막기 위해 최후까지 분투했다. 그러나 반란이 끝내 성공하면서 장 전 사령관은 신군부에 체포돼 육군 소장에서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8f7f1d4804adcc30b46a3270963e90ce630439aedc1a3e2c64adc12af00262721adfb5b7c5a1be72ee414069ee8ca641761d796bd9cef54b05239a55b0efc08f

장 전 사령관은 “12·12는 반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총책임자였던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주도한 반란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됐다. 나는 물론이고 계엄사령관이나 국방장관, 대통령께서도 감쪽같이 몰랐다”며 “내가 그날 연희동 저녁 식사에 유인돼 도착했던 시간이 오후 6시반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95% 이상 반란 성공이 보장된 상태였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어 “실제로 내가 (당시 상부에) 요구했던 병력이 한 사람이라도 동원됐나. 그 사람들이 전부 (쿠데타) 판을 다졌다”면서 “사령부에 들어가 보니 반란 진압 주력 부대인 30경비단장, 33경비단장, 헌병단장 세 단장들이 전부 경복궁 30경비단 반란에 가담하고 있더라. 그 사람들은 10·26 직후부터 한 달이 넘도록 충분한 반란 준비를 한 것이었다”고 돌이켰다.

장 전 사령관은 원망스러운 게 있다면 자신이 가장 원망스럽다고 했다. 그는 “내가 하도 못나서 나의 소임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다만 “아쉬운 점은 내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을 요청했을 때 즉각 승인 조치가 내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짚었다.


2d73e3cd3333a83430eec55977c35b0f461bea95a84b375a2a435dbbed1a3d027dd1d3694ee4df8126c415cba00def63b3b7af9922c71249e0588115d213de1d

장 전 사령관은 “(요청한 병력이 동원됐다면) 경복궁에 있던 반란군 4개 여단 정도야 일격에 끝장내버릴 수 있었다”면서 “감히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 대한 불경인 줄 알면서 말씀드리자면 국가의 궁극적인 반란 진압 책임은 헌법상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이 내란과 반란으로부터 국가의 헌정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장관 보고가 없었더라도 즉각 진압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12·12 이후 장 전 사령관 개인의 비극도 시작됐다. 장 전 사령관 체포 소식에 분개한 부친이 곡기를 끊고 이듬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서울대생이던 아들은 같은 해 실종됐다가 낙동강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장 전 사령관은 “아들이 2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 간다’며 나가선 한 달 동안 소식이 없더니 변사체로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발견 장소인 낙동강변 야산에 가보니 (아들 시신이) 완전히 얼어 거적때기로 덮여 있었다”며 “그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일그러진 아들 얼굴을 아내에게 보일 수 없어 제가 입김으로 녹이고 혀로 씻어냈다. 그때 눈알에서 사탕만 한 얼음덩어리가 나왔는데, 이놈이 얼마나 세상을 원망하고 가는 눈물인가 생각했다. 오늘날까지 제 가슴에 수만 개의 못이 돼 있다”고 토로했다.

장 전 사령관의 아내는 생전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이 어쩌면 이렇게 비참하게 돼 버렸는지 모르겠다. 국가에 잘못을 저질렀거나 도적질을 했거나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니잖느냐”며 “(한번은 남편에게) 농담으로 ‘당신은 왜 그쪽에서 회유할 때 넘어가지 않았느냐. 그쪽에 가 있었으면 득세하고 호의호식하며 가족이 잘지내지 않았겠느냐’고 했다”고 말했다.


fe09c207b06f96fe5df907edac3f8a36428eba1847e1700aadaa1fc69592e970b161f283e30b1e238892ae51cd5858731a432ee66e35485c4fd28847855982c9

장 전 사령관은 “나중에 내가 그 사람들(신군부)을 반란죄로 고발했더니 (되레)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7번의 고소를 받았다. 그중에는 내가 그들에게 욕을 했다고 하극상이라는 것도 있었고, 오히려 내가 병력 동원을 요청했다는 이유로 반란죄라는 것도 있었다”고 허탈해했다.

그는 끝으로 “군의 최고 가치는 국가가 요구할 때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이라며 “생명을 바칠 기회가 없을 때는 자신에게 주어진 국방 임무에 최선을 다해 충실히 임해야 한다. 쿠데타 하는 것이 군의 임무가 아니다”고 일갈했다.

장 전 사령관은 뒤늦게 명예를 회복해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과 국회의원 등을 지내다 2010년 78세로 사망했다. 그가 숨지고 2년 뒤에는 부인이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공유하기
광고보고 콘텐츠 계속 읽기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아직 콘텐츠가 없습니다.